[범물시니어기자단] 송두환, 백기만 독립지사의 유택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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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의호 작성일 26-06-16 08:29 조회 53회 댓글 0건본문

국립신암선열공원 안내도의 뒷면. 이곳에 안장된 서훈 지사 48위의 약력이 얼굴 사진과 함께 소개돼 있다. 사진 송의호
미서훈자로 남은 백기만 지사
현충일 나흘 뒤 필자는 범물동에서 시내버스 순환3-1을 타고 큰고개오거리를 지나 신암선열공원 정류장에 내렸다. 표지판을 따라 10분쯤을 걷자 금호강변 구릉에 자리한 국립묘지가 나타났다. 첫 참배다.
묘역 앞 안내도에 일제강점기 이 나라 광복을 위해 몸을 던진 대구와 경북 등 지역 출신 독립지사 52위의 유택(幽宅)이 제1묘역부터 제5묘역까지 일련번호로 표시돼 있었다. 왼쪽 제1묘역부터 선열의 이름과 묘비를 마주하며 찬찬히 걸었다. 제1묘역 1번은 광복군으로 활동한 송서룡 지사가 잠든 곳이다.
그 위로 제2묘역을 지나 오른쪽 제3묘역 18번에 시인 백기만 지사의 묘가 있었다. 묘비에 눈이 갔다.
‘…일찍이 문학에 뜻을 두고 이상화 형제와 동인지 거화(炬火)를 펴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학도 대열 선봉으로 활약하다가 피검돼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감했다. 1920년 선생은 와세다대학에서 시 창작을 시작, 1923년 개벽(開闢)에 저항시 ‘고별’ 등을 발표했다. 또 함께 유학한 양주동 등과 동인지 금성(金星)을 창간한다. 그해 선생은 대지진으로 귀국해 1924년 통신중학강의록을 출간하고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다 1936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뒤 선생은 대구시보사 주필 등 향토 언론에 몸담았다.’ 그러나 묘지 앞 표지석엔 행적 불분명, 미서훈자로 새겨져 있어 안타까웠다.

제4묘역 맨 앞에 자리한 애국의사 송두환(건국훈장 애국장)의 묘. 뒤로 다른 지사의 묘가 보인다. 사진 송의호
임시정부와 신간회 이끈 송두환 지사
제4묘역 맨 앞에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송두환 지사의 묘(29번)가 있었다. 그는 대구 출신으로 1919년 대구와 신의주에 가옥 2채를 사들여 독립운동 거점을 마련했다. 콧수염이 인상적인 지사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군자금 모금 요원으로 활동 중 체포돼 징역 2년의 옥고를 치렀다. 1926년에는 신간회 대구지회 집행위원장을 지내고 1930년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묘비엔 ‘형극의 한평생 조국 광복에 바친 독립투사 이곳에 잠들다’라고 새겨져 있다.
마지막 52번은 애족장을 받은 김점학 지사. 그는 대구청년동맹 집행위원을 지냈다. 묘역 순례를 마친 뒤 사당 단충사(丹忠祠)에 들러 헌화한 뒤 임들의 안식을 빌었다.
국립신암선열공원 김미현 관리소장은 “이곳은 추가로 안장할 수 없는 만장 국립묘지”라며 “공원 기능을 겸해 밤 9시까지 개방한다”고 설명했다. 지난해만 학생‧단체 등 5만여 명이 찾았다고 한다. 광복의 함성을 들은 시니어라면 꼭 한번은 들를 만한 가슴 찡한 공간이다.
송의호 기자 yeeho12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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